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

“언제 시를 읽어요?” 누가 묻습니다. “네, 늘 읽지요. 밥하다가도 읽고, 게을러질 때도 읽고요. 생각이 막힐 때, 답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더 읽어요. 시는 오래 곰곰 생각해야 하는 언어라서, 제 사유와 상상력의 한계를 늘 시험하는 언어라서, 인내심이 필요한 물음표를 마주하고 풀어가는 시간에 슬며시 답이 주어지니까요.” 시는 영성이 깃든 철학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실제로 시인은 철학자에게 중요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철학자의 말이 시인의 말과 통하는 접점도 많습니다. 지난해 내내 몰두했던 번역 시집이 얼마 전 「DMZ 콜로니」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요. 여기서도 시인은 철학자의 말을 화두로 인용합니다. 시인 최돈미가 프랑스의 사상가 루이 알튀세르에게 기댄 것은 ‘호명(呼名)’, 즉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 관한 질문. 개인은 호명에 응답하면서 주체가 되는데, 알튀세르는 그 주체적인 이름이 동시에 사회적 구조에 종속된다는 걸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시집에서 시인은 공적인 역사가 묻어버리고 싶은 상흔을 발굴하여 실험적인 형식으로 보여주는데요. 이를테면 과거 통치자의 계엄령으로 인한 무고한 이들의 희생, 양민 학살이라든가, 고아라든가,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등, 전쟁과 가난과 억압으로 얼룩졌던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집을 번역하면서 저는 또 뭐든 파고드는 버릇대로 시인이 호출한 철학가의 책을 다시 읽었지요. 알튀세르는 현대철학의 한 산맥을 이룬 철학가지만,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았던 사람. 급기야 정신착란으로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사건 끝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지요. 하지만 그가 남긴 자서전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폴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지금 예순일곱 살이다. 그러나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이런 통찰을 할 수 있다니. 이 계절에 그의 말을 곱씹어 봅니다. 빛의 선물은 존재의 충만함을 오롯이 느끼게 하고 그 어떤 슬픔도 다 잊게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말을 남긴 철학가는 가정이나 학교, 국가, 교회 등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제도가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했는데요. 저는 이 말을 통해 알튀세르에게 본인도 잘 몰랐을 하느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해요. 매 순간의 빛을 선물로 느끼는 힘은 신성 외에 다른 걸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참담한 비극을 통과한 연약한 철학자가 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무구(無垢)한 영성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오월 하루하루, 누구나 이 빛의 축복을 매 순간 놓치지 말고 받으시길 소망해 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22면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야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 / 햇빛 뒤에 그늘이 있는 건 사랑스러운 모습이야 밝은 미소를 짓지 않아도 사랑할 이유가 많단다.” ‘악뮤’라고 부르는 악동뮤지션의 새 노래를 요즘 즐겨 듣습니다. 아픈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는 것 같은 노래예요. 처음 이 칼럼 제안을 받았을 때 ‘나의 기쁨과 슬픔’으로 칼럼 제목을 삼으려 했는데 그때 생각했던 마음이 이 노래에 오롯이 담겨 있어 신기하기도 합니다. 서로 알지 못해도 마음은 이렇게 저절로 연결이 된다고요. 새로 나온 앨범의 노래들은 악뮤의 오빠 찬혁이가 우울증과 여러 이유로 힘겨워하던 동생 수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만든 것인데요. 찬혁은 이에 대해 “동생을 잘 프로듀싱해주고 싶었다”고 표현을 하네요. 얼마나 예쁜 말인지요. 노래처럼 동생을 잘 가꾸어주고 싶은 마음. 수현은 오빠가 입대한 후 책임감과 부담감에 짓눌려 커튼을 친 어두운 집에서 혼자 지냈다지요. 폭식에서 위로를 찾는 바람에 몸이 급격히 불기도 했고요. 그런 동생에게 오빠가 손을 내밀어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어 준 것인데, 담담하게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힘은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오빠의 사랑에 동생도 용기를 내어 응답을 한 것이고, 둘은 다시 무대에서 예쁜 노래를 부릅니다. 찬혁은 말합니다. 슬픔 다음에 기쁨에 대해서는 대개들 좋다고 생각하지만 기쁨 다음에 슬픔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기쁨 다음에 슬픔까지가 하나라고요. ‘나의 기쁨과 슬픔’을 칼럼 예비 제목으로 처음 떠올렸을 때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샴쌍둥이처럼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슬픔을 대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쫓아내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요. 아픔도 마찬가지고요. 기뻤던 만큼 슬프고 슬펐던 만큼 기쁘다고요. 사랑한 만큼 아프고 아팠던 만큼 사랑하는 거라고요. 그러니 슬픔이나 아픔을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는 일은 우리가 예쁜 돌로 단단해지는 과정이지 싶습니다. 4월에서 5월, 초록이 짙어집니다. 어제는 독감으로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눈부시고 신록이 너무 예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주여!” 했답니다. 어지럽고 아찔한 날이었기에 그 부름은 기쁨이면서도 탄식이었어요. 마태오복음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고 했는데, 하느님을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느껴질 때가 많아서 요즘 자주 질문을 하곤 합니다. 제가 맞나요? 주님? 그래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으며 천사처럼 고운 노래를 불러주는 이들이 있어 오늘도 행복합니다. 오늘도 힘을 냅니다. 기쁨 뒤의 슬픔을 겁내지 말라고,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슬픔도 축복이라고. 나를 나로 살게 하는 힘은 그 모두를 다 품어주는 데서 오는 거라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매일 새로운 길 위에서 품어줄 것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기도를 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2면

영원이 아니라서

영문학 중에서도 현대 미국 시를 전공해서 주로 시를 가르치고 연구하지만, 그 중심에는 시의 언어를 일반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소명이 있습니다. 시는 정갈한 지혜의 샘이라 그걸 나누고 싶거든요. 한국 시를 영어로, 영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저는 매일 무언가를 옮기는 사람이 됩니다. 고민을 거듭하다 마침표를 찍으면 마음이 시원섭섭. 그때그때 좀 다르지만 대개 시원 80%, 섭섭 20%쯤 되는데 이번에는 워낙 오래 붙잡고 있던 시집이라 시원 95% 섭섭 5%쯤 되는 것 같아요. 초고는 여러 해 전에 끝냈지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마침내 끝. 곧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시집 제목이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라 오늘은 영원과 영원 아닌 것에 대해 생각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 무엇이 있을까요? 떠오르는 것들이 많은가요? 영원이 아니라서 좋은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하는 전쟁도 영원이 아니라서 좋고, 지금의 통증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을 알기에 견딥니다. 알기에 견딘다는 것보다는 믿기에 견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이 영원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요. 지독한 그리움이 영원이 아니라서 얼마나 고마운가요?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는 길목에서 짧게 빛났다가 스르르 무게 없이 낙하하는 꽃잎의 찰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을 상상하는 일은 지금 막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저 허공에 번지는 무수한 빛깔들을 보게 합니다. 떨어지면서 녹아버리는, 한순간 세상을 아름답게 채웠다가 사라지는 흰 눈의 부드러운 속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맹세나 사실, 확신 등 세상을 채우는 많은 것들 속에서 시인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을 불러 우리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시집에 <택시에 두고 내렸다>라는 재밌는 시가 있는데요. ‘나는 어둠이 매일 온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 다른 하늘의 새 떼를 깨달은 사람이. / 내가 없는 너의 하루를 / 가만히 수긍한 사람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슬프고도 아픈 구절인데, 이 가만한 수긍이 참 좋습니다. 나여야만 하고 내가 있어야만 하고 모든 일에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내가 아니어도 되고, 내가 없어도 되는 마음, 이 비움. 이 대목이 너무 좋아 읽고 또 읽습니다. 오늘은 영원이 아니라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시인 다음으로 깨달은 사람인 척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저 고운 저녁노을, 그 다음엔 어둠이 매일 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영원이 아니기에 가능한 걸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다부지게 새깁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괜찮다고. 영원이 아니라서 허락되는 이 모든 기쁨과 슬픔들. 고맙다고. 그 너머에 굳건한 우리 하느님이 계셔서 너무 좋다고.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22면

우분투 우분투

올해 3월 세계문학 행사로 DMZ에 다녀온 후, 지워지지 않는 잔상과 말들이 계속 어른거려요. 폭력과 죽음이 낭자한 곳에서 건너온 이들이 용서와 화해,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바로 우리 분단의 현장 DMZ였기에 더 실감 나기도 했는데요. 그 엄중한 땅에서 작은 말의 씨앗을 하나 품어 왔는데 바로 ‘우분투(Ubuntu)’입니다. 초대된 작가 중에 아프리카 소년병 출신의 이스마엘 베아가 있었어요. 그는 서아프리카에 있는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났는데, 내전이 발생하여 12살에 가족을 잃고 소년병으로 징집됩니다. 당시 만 명 정도의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었다고 해요. 전쟁에서 “매우 빨리 광기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베아. 살육과 복수의 현장을 전전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죽이고 끝까지 살아남는 법을 배운 그는 우연히 유니세프에 구출되어 전쟁에서 벗어납니다. 보호학교에 다니며 마약을 끊고 아이로 돌아가는 길을 배우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어 “모든 아이는 희망입니다”라고 말하는 베아. 이제는 인권운동가이자 작가로 살아가는 베아는 유머가 넘치고 저음의 목소리가 멋졌어요. 저녁 식사 자리에선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를 기막히게 불렀지요. 베아는 대담 자리에서 친구 소년병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소년병 친구가 적에게 두 손이 잘렸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두 손을 자른 병사도 전장에 끌려 나온 소년병이었지요. 그 소년병이 다시 잡혀 와 손 잘린 친구와 대면하게 됩니다. 손 잘린 친구가 묻습니다. “왜 내 손을 잘랐니?” 적 소년병이 대답합니다. “네 손을 자르지 않으면 우리 둘 손을 다 자른다고 해서야.” 친구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다행이네, 네 손이라도 남아 있으니.” 그리고 자기 손을 자른 병사를 용서해 주었다는 이야기. 믿기지 않는 이 생생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살아있는 예화로 제 머리를 쳤어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늘 질문이 꼬리를 무는 구절. 무엇이 용서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답은 우분투에 있었어요. 아프리카의 평화 정신을 상징하는 이 말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 정말 용서하기 힘든 사건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가요. 하지만, 그래도, 끝내, 우분투를 말하는 이를 마주하며 그 말을 따라 하면서 저는 속으로 ‘아멘’ 했습니다. 낮게 엎드리게 되는 말. 전쟁이 인간의 야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면 소년병의 용서는 야만이 죽이지 못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우분투.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어요. 이 시간에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희망의 씨앗인 아이들이 다시 웃게 되길 바라며, 새로 배운 말을 홀씨처럼 뿌립니다. 우분투, 우분투.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2면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

비를 좋아해요. 맑은 햇살도 좋아하지만, 비가 내리면, 특히 늦은 밤에 빗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콩콩 뛰어 잠이 들지 못한답니다. 오늘, 봄비가 촉촉이 내린 한낮, 일을 마치고 기분 좋게 걷고 있었어요. 이 비 그치면 세상이 얼마나 더 파릇파릇해질지 생각하면서요. 사람들이 광장에서, 꽃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네요. 지금 이 순간은 전쟁 걱정도, 취업 걱정도, 사무실에 들어가 처리해야 할 서류 걱정도, 아픈 가족 걱정도 다 잊은 표정이에요. 친구와 차를 마시고 나오니 바람결이 좀 거칠어지네요. 빗방울도 굵어지고 순한 봄비가 여름 폭풍처럼 사나워지네요. 느긋하게 걷던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빨리하네요. ‘이러다 저 꽃들 다 지겠다’ 싶어서 그만 마음이 아슬해졌어요. 젖은 보도 위로 꽃잎들이 이미 점점이 떨어지고요. 아깝다, 안타깝다, 어쩌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꽃들은 이미 제 몫을 충분히 했구나. 온전히 이 순간에 존재한 것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힌 이 며칠의 빛으로 충분했구나. 벚꽃은 벚꽃대로, 목련은 목련대로, 피어나 지는 생명의 순리를 이리도 아름답게 보여주었으니.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 상실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첫 마음을 다 보여주고 떠나는 꽃무덤을 보며, 더 이상 슬프지 않았던 오후. 지난 일을 놓지 못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없이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피어 있음의 의미를 알게 한 꽃나무.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쌓아두고 쟁여두는 걱정도 말라고, 마음이 바빠 마주하는 사람과의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던 어제를 반성하며 돌아오는데, 멀리서 친구가 사진을 보내줍니다. “이 비에도 꽃나무에 꽃잎이 그대로야. 의연하지? 연약한 꽃잎이 강한 비바람을 이기는 것 같아. 기운 내.” 마음이 괜히 서성이고 불안한 날에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세계가 너무 위태롭게 느껴질 때는 부드러운 것들에 마음을 내어줍니다. 아이의 웃음, 투명한 햇살 한 자락, 고요한 순간에 들리는 가느다란 새소리, 보드라운 연둣빛, 빗방울 소리, 어느 날 받은 카드 한 장.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은 떠들썩한 소란 대신 고요에 기대는 일. 복잡한 계산 대신 단순함을 믿는 일. 고단한 하루를 화로 풀지 말고 감사로 여미는 일. 이 순간의 충일함에 기대어 한 걸음 걷다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어느새 가까워집니다. 희망이 곧 믿음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믿어요. 힘을 좋아하고 협박과 억압을 즐겨 하는 이들이 일으킨 전쟁은 작고 연약한 것들을 보듬는 생명과 평화의 기도에 곧 지게 될 것이라고요. 늘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이 오늘 봄비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22면

사는 동안 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봄꽃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볕 좋은 곳의 개나리는 벌써 노랑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려 하고 벚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꽃을 연구하는 분의 말씀에 따르면 지난겨울이 예년보다 추웠기 때문에 올봄 벚꽃의 휴면 해제 시기가 빨라진 거라고 하네요. 겨울엔 겨울나무처럼 단단하게 안으로 응집하는 힘을 키우려 기도했는데, 봄이 되니 수줍게 피어나 어느 순간 화르르 주위를 밝히는 봄꽃이 되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붓글씨 쓰시던 책상 위, 종이 뭉치 속에서 발견한 글귀입니다. 주로 한자로 붓글씨를 쓰셨기에 아버지 붓글씨 작품을 알아보려면 얇은 한문 지식으로 늘 더듬더듬 읽어야 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사는 동안 꽃처럼’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엄격하고 단아한 서체를 즐겨 쓰셨는데 이 문구는 캘리그라피를 하듯 꽃처럼 날아가게 쓰셨네요. 서예대전에 출품할 목적으로 표구한 작품이 서재에 하나 걸려 있는 걸 제외하고는 아버지 쓰신 글씨는 이렇게 종이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숨결처럼 쓰다듬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처음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붓글씨 덕분에 이 봄 매일 새기며 생각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DMZ세계문학페스타’라는 행사에 참여해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요. 팔레스타인의 작가 아흘람 브샤라트는 어렵게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기적처럼 죽음을 건너온 사람이 환하게 꽃처럼 웃습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 이웃의 가족이 명절에 입을 옷을 사러 가다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에 살해되었다고 해요. 뉴스를 들어도 남의 일처럼 실감 나지 않던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들으며, 도라산 전망대에서 가까운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절감합니다. 평화는 매일 한 걸음씩이라도 더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일임을. 사는 동안 꽃처럼. 성경에서 꽃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자주 비유되는데, 저는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자주 새깁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 6,28) 솔로몬왕의 영광도 이 꽃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라는 뜻이겠지요. 하나인 세상이 분열하고 나뉘어 서로 공격하면서 전쟁의 불안이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이때, 평소 별생각 없이 쓰던 기름이, 원재료들이 모두 유한한 자원임을, 우리가 그동안 기적처럼 서로 돕고 나누며 이어왔음을 뒤늦게 실감합니다.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아무 불안 없이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봅니다. 부는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질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피어 있는 꽃. 곧 사라질 영광이 이 찰나의 시간에 기입됩니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각자의 고투로 바쁘고 힘들지만, 사는 동안 꽃처럼!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슬픔, 하느님의 신비를 모두 간직한 꽃들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오늘, 주님 부활하신 빛과 함께 흐르는 이 시간, 그대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2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기적이 뭘까요? 경이로움은 뭘까요? 우리는 언제 기적을 만날까요? 어떤 일을 마주해도 잘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깜짝이벤트는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합니다. 선의로 준비한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무감각한 반응. 정연한 논리와 일관된 법칙에 익숙한 사람은 새로움 앞에서도 ‘그렇지 뭐’ 합니다. 반면 잘 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 많은 이 사람은 놀라지 않는 사람의 평안이 가끔 부럽기도 합니다. 반짝 눈을 떠 놀라다 보면 세상살이에 덜 노련한, 경험 미숙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해서 애써 무덤덤한 척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덤덤한 쪽? 잘 놀라는 쪽? 타고난 기질이 어디에 기울어 있던 우리는 순진함과 노련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나름 애쓰면서 살지요. 저는 경이로움을 잘 발견하고 잘 놀라는 편이라 매일 감사와 기쁨의 조각들을 기록하고 있어요. 나중에 돌아보면 소중한 보물이 되어요. 동시에 슬픔에도 잘 이입이 되어 마음이 자주 아파요. 그래서 마음의 추를 덤덤함으로 애써 옮기려고 하는데, 산책길의 기도는 그 평형을 잡는 좋은 안내자입니다. 어제도 어김없이 걷다가 어떤 기적을 만났어요. 활짝 핀 개나리 무리! 먼 땅에선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 비극이 우리에겐 코스피 지수로 환원되어 전해져 슬펐고, 이 땅에선 여러 목숨을 앗아간 화재 사건이 발생했는데, 위험에 대한 경고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그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경고가 묵살되었다니, 세상이 왜 이럴까, 한 목숨의 무게는 한 우주와 같은데, 왜 이렇게 우리는 같은 비극을 반복할까. 이런 생각에 잠겨 걷다가 그만 넘어져 살짝 발목이 접질렸네요. 근처에 나무 벤치가 있어 앉았는데, 그 덕분에 개나리 꽃잎을 한참 바라볼 수 있었어요. 발목 통증도, 세상 시름도 잊고 활짝 웃었답니다. 봄이 참 좋아요. 김소연 시인은 봄을 두고,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이라고 했지요. 겨울 동안 우리가 무얼 했든지 상관하지 않고 이렇게 어김없이 예쁘게 우리 앞에 다가오는 기적.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40일의 참회와 정화를 지나서 주님 부활로 이어지는 40일의 시간이 봄과 겹쳐 있어서, 경이를 온전히 보여주어 참 좋습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경이로움에 대해 “앎도 아니고, 앎을 그만두는 것도 아니다”라며, 경이로움은 ‘움직이는 무덤’이라고 했네요. 이때 움직임은 추동력, 밀어 올리는 힘 같은 것. 땅 밑에서 꽃을 피워내는 힘,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힘과 비슷합니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세상에 놀라운 일을 이루신 그분의 업적을!”(시편 46,9) 시름 많은 세상에서 여전히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놀라게 하실지 기다리며 하루를 엽니다. 발을 삔 덕분에 산책길에 흘낏 지나치던 꽃 덤불 앞에서 여리고도 강인한 꽃잎들을 마주할 수 있었던 어제도 기적이었고요. 오늘은 또 어떤 경이 앞에서 눈을 뜨게 될까, 기적처럼 전쟁이 끝날까, 전선을 뚫고 평화를 전하려고 누가 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6면

늘 집으로 가는 우리

연한 봄 하늘에 홀리듯 이끌려 길을 나섰습니다. 마무리해야 하는 번역이 있어서 컴퓨터 앞에서 더 고민을 해야 했지만 하늘이 저를 밖으로 부르네요. 며칠 사이, 나무에 연두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이리 고운 생명을 품은 나무는 그대로 신비입니다. 메마른 개나리 덤불은 연노랑 꽃순을 벌써 피워내고 있습니다. 산길을 휘돌아 걷는 길에는 사람도 많고 이야기도 많습니다. 저는 주로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합니다. 바빠서 챙기지 못한 이들의 안부도 가끔 물어보고요. 넘어져 다친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친구는 어머니가 아프다 하시는 걸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 하네요. 매번 화급하게 반응하는 게 맞는지,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게 맞는지. 매일 119를 부를 수 없기에 절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객관화를 하는 자신이 잘못된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묻습니다. 친구의 다정한 성품을 알기에 그런 것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지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서툰 위로자이지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호흡의 휴식입니다. 봄 하늘을 보며 걷다가 저는 그만 또 눈물이 났어요. 봄의 빛깔이 너무 고와서 또 아버지 생각이 났고, 투병 중이신 삼촌을 떠올리며 묵주기도를 드리던 중에는 간절함에 또 눈물이 났어요. 전쟁이 어떻게 될까,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소매로 눈물 닦으며 걷다가 문득 독일의 작가 노발리스의 말이 생각났어요.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가?”, “늘 집으로 가지.” 작가가 짧게 세상을 다녀간 후에 나온 작품집에 실린 한 대목. 그리움과 염려에 눈물 그렁그렁 차오르던 산책길에 저를 살린 건 이 말 한 마디, 그리고 봄 하늘. 오늘 연한 하늘빛은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눈을 내내 하늘에 두고 “늘 집으로 가지”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그 집은 우리의 본향이라고. 어리석은 인간이 세상을 비참하고 어렵게 만들어가는 시절에도 다시 돌아온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하루는 얼마나 보드라운지, 신비한 평화와 일치 안에서 저는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존재의 근원인 그 집에 이미 안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제의 삶과 오늘의 죽음에 절망하면 아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오늘 제게 온 말의 선물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싶어요.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늘 주시는 선물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평안의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 평안은 내어줌과 내맡김이고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이미 주신 평화 안에서 우리는 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늘 집으로 가는 우리임을 안다면 분쟁도 전쟁도 멈추어야 할 텐데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잿빛 하늘 아래 고통받는 이들의 숨 막히는 공포에 부디 하느님이 함께하시길 빌며 평화를, 평화를 빕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22면

인간이 인간에게 무얼 만들었기에

봄 학기의 강의실이 호기심으로 반짝입니다. 이번 학기에 ‘AI 시대의 영미문학’ 강의를 맡아, 첫 시간에 우리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시대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온당한지. 다들 ‘AI 시대’를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그게 시대를 규정하는 말이 될 수 있는지. 전 세계 80억 인구에 더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이 있을지. 이런 질문과 함께 두루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어요. 재난과 전쟁의 시대, 기후위기의 시대, 혐오와 불안의 시대 변화의 시대, 상상의 시대 등 여러 단어가 나왔는데, 마지막에 제가 지금 시대를 ‘사랑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지 물어보니 학생들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시를 읽으면 학생들은 대개 ‘시가 어렵다’고 난처한 표정을 합니다. 시는 구절들 사이의 틈새를 메꾸어 상상하며 읽어야 하지요. 시의 독자가 되려면 끈기가 있어야 한다며 시를 잘 읽으면 삶도, 이 세계도 잘 읽을 수 있다고 학생들을 살살 달래며 묻습니다. ‘여러분, 부자 되는 법 아세요?’ 학생들은 다시 눈을 반짝입니다. 효용가치가 적다고 여겨지는 인문학, 거기서도 좁은 영역에 있는 시를 읽는 일과 부자 되기가 무슨 상관? 뚱딴지같은 질문에 이어 말합니다. ‘시의 언어를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구체적인 시선을 얻으면 풍성해지지요. 통념을 거슬러 다시 생각하는 사유의 힘이 여러분을 튼튼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그렇게 읽은 첫 시에 이 구절이 있었어요. “인간이 인간에게 무얼 만들었기에.” 봄날 아침에 시인은 새소리를 듣습니다. 숲에서는 만물이 조화롭게 깨어나는 것 같은데 시인은 문득 슬픈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세상을 생각하니 이런저런 근심이 스며든 것이지요. 19세기의 시인은 산업혁명이 몰고 온 기계화에 침탈당한 농촌을 아프게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21세기 교실, AI 시대에 이 질문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최근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AI에 서로 다른 답이 나오기 마련인 질문을 던졌더니, 다른 AI들이 모두 다 비슷한 대답을 했다고 해요. 확률을 앞세운 AI는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지요. AI를 앞세워 손쉽게 치르는 전쟁은 죽음마저도 전략 게임으로 소비하면서 사람들의 고통을 지우고 있고요. 기술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술적 성취의 열매는 극소수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초연결 사회에서 상처받는 개인의 고립감은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존엄성을 잃은 인간이 스스로 도구로 전락할 때 이 세계는 문명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 아래 여전한 황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실 때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마음, 연민으로 다정하게 보좌하는 그런 인간을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전장(戰場)과 안방의 거리가 사라진 이 무자비한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무얼 할 수 있나’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학기가 끝날 즈음엔 이 시대를 ‘사랑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고 긍정하는 학생이 더 늘면 좋겠다는 바람 속에 또 시를 읽습니다. 공감을 잇고 고통을 나누는 연습, 그 작은 사명에 동참하는 시간이 감사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22면

아무도 원치 않는 길을 걸으셨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선물입니다. 아침이라는 선물 외에 다른 선물도 여럿 당도한 봄날. 제자가 노래를 하나 보내주었고, 동료 선생님은 책을 보내주셨네요. 제자는 랩을 참 잘해서 아이돌로 성공할까 싶던 아이였는데, 신학대학원에 가더니 이제는 교회에서 신앙의 길을 이끄는 사목자가 되었네요. 학생들은 가능성의 씨앗입니다. 저는 그 씨앗에 물을 주는 사람. 가능성을 믿고 정성 어린 마음으로 마주하며 나누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먼 지방에서 서울로 와서 보니 지역의 격차가 너무 크다고, 고향에 남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아이였습니다. 사랑 많은 그가 기도하는 어른이 되어 참 좋습니다. 그가 보내온 성가를 듣는 봄날 아침이 그대로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 주님이 가신 길 아무도 원치 않는 길을 내 주님이 걸으셨네.”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에 대한 노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주님이 따르신 순종의 길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길 같아요.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래요. 자기 몸의 안위를 생각할 때는 어떤 일을 하는 동기 부여가 쉽게 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순종은 얼핏 이해가 잘되지 않지요. 타인을 구원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하지만 지금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깎아가며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계시기에, 주님 걸으신 순종의 길,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게 합니다. 다시 노래를 듣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가신 주님은 순종하셨네 그의 몸을 버리셨네.” 몸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 지상에서 몸을 버리는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병원 중환자실에서 고통받으셨던 3일간, 이 성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고통에 몸을 비틀고 얼굴을 찡그리시는 아버지를 보며 울면서 생각했지요. ‘아버지,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셨는데, 인간됨으로 겪는 이 고통을 부디 조금만 참으세요. 아버지 조금만 더 참으세요.’ 어쩌면 참 야속할 수도 있는 딸의 기도였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다시 떠올리지만, 사실 이 길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영적인 실천을 통해 이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하실 때, 여기서 ‘날마다’는 매일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의 신비를 이야기하니까요. 한편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는 그 순종의 길이 절대적인 비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몸을 완전히 비우고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는 이제 죽음 너머에서 제게 질문하십니다. 유교의 관습으로 2대 양자의 삶을 사신 아버지는 양쪽 집안의 무게를 오롯이 지면서 사셨기에 참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묵묵히 참아가며 걸으신 그 조용한 길은 어쩌면 예수님을 닮은 작은 순종의 길이었음을, 주어진 운명을 불평 없이 따르신 아버지의 삶이 곧 믿음의 삶이었다 싶습니다. 지금 제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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