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말고 인간!] AI가 가르친다? 그래도 인간이 배워야 한다

지난 추석, 완벽한 차례상 위에는 정작 아무도 모르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며느리는 인터넷에서 ‘차례상 차리는 법’을 검색했고, 화면 속 정갈한 표는 홍동백서와 조율이시까지 순서대로 일러주었다. 상은 표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만으로 완성됐다. 그러나 정작 그 앞에 선 사람들 가운데, 대추가 왜 그 자리에 놓였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과 뉴멕시코주립대학교 공동연구진은 2025년 10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익숙한 장면의 속내를 밝힌다. 연구진은 만 명이 넘는 참가자를 모아, 한쪽은 생성형 AI의 요약으로, 다른 한쪽은 기존 방식대로 웹 검색 링크를 하나하나 찾아 읽게 했다. 그 뒤 각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써 보게 했더니, AI로 배운 이들의 글은 유독 짧았고 구체적인 근거도 적었으며 서로의 글이 놀랍도록 비슷했다. 정보를 직접 찾아 나선 사람들과 달리, 힘을 덜 들인 자리에는 남는 것도 적었다는 뜻이다. 이 조언들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은 채 1493명에게 평가를 맡기자, 사람들은 AI로 배운 이의 조언을 한결같이 덜 유익하고 덜 믿음직하다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AI는 정답을 가르쳐 줄 뿐, 그 정답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걸어야 비로소 배움이 된다고 짚는다. 차례상 앞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화면 속 표를 그대로 따라 하면 상은 차려지지만, 그 뜻은 차려지지 않는다. 대추는 씨가 하나여서 임금을 뜻하고, 밤은 세 톨이 나기에 삼정승을 뜻하며, 나물과 생선은 각각 땅과 바다의 결실을 대표해 나란히 놓인다는 것. 이런 이야기는 검색창이 아니라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나온다. 물어야 들을 수 있고,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새겨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AI는 가르친다. 배움은 그 가르침을 스스로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화면 속 표는 상차림의 순서를 알려주지만, 그 순서 뒤에 담긴 마음까지 옮겨주지는 못한다. 조상을 기억하는 일도, 곁에 있는 가족을 헤아리는 일도, 누군가 가르쳐준다고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리서를 통째로 외운다고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기도문을 수십 년 바치고도 그 뜻이 삶에 스며들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짧은 한 구절을 붙들고 평생을 씨름하며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빚어낸 이도 있다.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배움은 저마다 다른 무게로 새겨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그 가르침과 씨름했느냐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가르침을 내놓아도, 그 가르침을 배움으로 바꾸는 몫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명절은 지나갔지만, 그 물음은 지나가지 않았다. 조상이 왜 그 자리에 대추를 놓았는지, 부모님이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가르침만으로는 끝내 내 것이 되지 않는 그 이유를 다음에 만나면 다시 여쭤보자. 가르침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배움은 죽는 날까지 계속된다. AI가 가르친다? 그래도 인간이 배워야 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10-18 제3511호 17면

[AI 말고 인간!] AI가 읽는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로새긴다

전철에서 마주 앉은 승객들의 손끝은 하나같이 화면 위를 오간다. 뉴스 기사 하나를 다 읽었다고 느끼며 화면을 내려놓지만, 정거장 두어 개를 지나면 방금 읽은 제목조차 흐릿해진다. 반면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은 문장 하나는 며칠이 지나도 문득 떠오른다. 같은 글자를 읽었는데, 왜 하나는 스치고 하나는 마음에 새겨지는가. 이 물음에 ‘뇌파’로 답한 연구가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 산하의 언어 및 인지 뇌과학 연구실은 2024년 5월, 뉴욕 대도시권의 중학생 59명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아이들에게 여러 편의 설명문을 종이 인쇄물과 노트북 화면으로 각각 읽힌 뒤, 읽은 내용과 관련 있는 단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하면서 뇌파를 살폈다. 눈길을 끈 것은 대놓고 관련 있거나 대놓고 무관한 단어가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한 단어를 마주했을 때였다. 화면으로 읽은 아이들의 뇌는 이 애매한 단어를 보고도 “이건 상관없는 말이네” 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반면 종이로 읽은 아이들의 뇌는 같은 단어를 보고 “어, 이거 아까 읽은 거랑 통하는데” 하듯 반응했다. 연구진은 이 차이를 종이로 읽은 글일수록 아이들 머릿속에 더 촘촘한 의미의 연결망이 형성됐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신호로 해석했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다. 문제를 얼마나 맞혔는지, 얼마나 빨리 풀었는지를 보면 종이든 화면이든 아이들의 성적은 큰 차이가 없었다. 시험지만 놓고 보면 둘 다 똑같이 잘한 셈이다. 그런데 뇌는 달랐다. 겉으로 드러난 이해도는 비슷했지만, 그 이해가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 주는 뇌파 신호는 종이 쪽이 더 뚜렷했다. 성적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벌어지고 있던 차이였다. 우리가 읽기에서 스스로 알아채기 어려운 차이가 의미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결과는 요즘 우리가 겪는 읽기와 겹친다. 화면을 밀어 올리며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다음 문장과 기사로 넘어가는 데만 마음이 가 있다. 이해했다는 감각은 들지만, 그 문장을 오래 붙들어 이미 알던 것과 이어 붙이지는 않는다. AI에게 요약을 맡길 때는 더하다. 결론만 받아 쥐면 다 읽은 것 같지만, 정작 문장과 문장을, 새로 안 것과 이미 알던 것을 스스로 이어 붙이는 수고는 건너뛰게 된다. 그 수고야말로 스치는 정보를 마음에 아로새기는 유일한 방법인데 말이다.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옮겨 담는 일이 아니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과 만나고, 그 만남이 이미 알고 있던 것과 부딪히며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흔적이 깊을수록 나중에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앎’이 된다. AI는 방대한 텍스트를 순식간에 훑어 그럴듯한 요약을 내놓지만, 그 요약을 받아 든 사람의 마음에 흔적이 남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흔적은 오히려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에게 책 한 권을 손에 쥐여 주는 일이 새삼 중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완독의 경험, 긴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는 인내,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 확인하는 손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에 무언가를 아로새기고 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은 책은 언제였는가. AI가 읽는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로새긴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10-11 제3510호 17면

[AI 말고 인간!] AI가 인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체감한다

봄볕이 따스한 화단 앞, 아이가 쭈그려 앉아 장미 한 송이에 손을 뻗는다.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꽃잎의 감촉, 코끝을 스치는 진한 향기, 손가락에 살짝 묻어나는 이슬. 이 감각들이 뒤섞이는 순간, 아이는 비로소 ‘장미’를 알게 된다. 이 앎은 누구도 말로 다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런데 요즘 AI에게 “장미를 아느냐”고 물으면, 막힘없이 색과 향과 촉감까지 유려하게 설명한다. AI는 정말 장미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장미에 대한 말들을 알 뿐일까. 오하이오주립대학교와 홍콩이공대학교를 비롯한 공동연구진은 2025년 6월, 이 물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4,442개 영어 단어를 놓고,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축적해 온 대규모 언어 평가 자료와 질문에 답을 내놓는 생성형 AI인 오픈AI의 챗지피티(GPT-3.5, GPT-4), 구글의 팜(PaLM2)과 제미나이(Gemini)의 응답을 나란히 비교했다. 비교한 특성은 세 갈래였다. 우선 어떤 단어가 좋은지 나쁜지, 흥분되는지 차분한지, 크기는 얼마만 한지처럼 몸의 감각이나 움직임과 관련 없는 차원을 비교했다. 또한 촉각과 청각, 후각, 시각, 미각 같은 오감으로 경험하는 차원을 비교하면서, 손과 발, 입, 몸통을 움직여 경험하는 운동 차원도 비교했다. 쉽게 말해 머리로 판단하는 것, 감각으로 느끼는 것, 몸으로 행하는 것을 따로 물어 비교한 셈이다. 결과는 차이를 분명히 보여 줬다. 몸과 직접 닿지 않는 차원에서 AI는 인간과 매우 비슷하게 답했다. 그러나 냄새와 촉감을 묻는 감각 차원에서는 일치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고, 손발과 몸통을 움직여 경험하는 운동 차원에서는 인간과의 유사성이 거의 사라졌다. 이미지까지 배운 GPT-4와 제미나이는 시각 차원에서는 살짝 나았지만 운동 차원에서는 똑같이 무력했다. 흥미로운 사실도 있다. 연구진이 처음 “당신은 이것을 얼마나 경험하는가”라고 묻자, AI는 몸이 없어 냄새 맡거나 만질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질문을 “인간이라면 얼마나 경험할까”로 바꿔야 했다. AI 스스로 몸이 없다고 고백한 순간, 이 연구의 결론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인식과 체감은 다르다. AI의 인식은 방대한 텍스트에서 패턴을 뽑아내는 일이다. 인간이 평생 읽을 수 있는 양을 아득히 뛰어넘는 글을 학습하고도, AI는 장미 한 송이의 향기를 몸으로 겪은 적이 없다. 반면 인간의 체감은 몸을 통과한다. 손끝으로 만지고 코로 맡고 발로 걸어 본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개념이 완성된다. 이것이 체화된 인지, 곧 몸이 체감의 통로라는 오래된 통찰이다. 향기를 맡아 본 적 없는 이가 아무리 유창하게 향을 설명해도, 그것은 체감이 아니라 체감의 흉내일 뿐이다. 우리는 요즘 몸을 쓰는 일을 점점 줄여 간다. 화면을 두드리는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다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수를 손끝에 찍어 이마에 긋고, 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고, 이웃과 손을 맞잡아 인사하는 몸짓에는 말로 옮길 수 없는 체감이 담겨 있다. 몸을 움직여 살아낸 시간만이 진짜 체감을 빚어낸다. 오늘 당신은 세상을 얼마나 몸으로 체감하고 있는가. AI가 인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체감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창작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의미를 짓는다

다음 달 아버지 팔순 잔치에서 축사를 읽어야 한다면 어떨까. 원고지 두 장 남짓, 길지 않은 분량인데 첫 문장이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AI에게 아버지의 고향과 평생 몸담았던 일, 그리고 ‘감사와 그리움’이라는 단어 두 개를 건네 본다. 몇 초 뒤 화면에는 흠잡을 데 없는 축사가 떠오른다. 문장은 매끄럽고, 마침표 하나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그 글 어디에도, 어릴 적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새벽 시장을 따라나섰던 기억은 없다. 완성된 글이지만, 내 글은 아니다. 캐나다 몬트리올대학교 심리학과와 퀘벡 인공지능연구소 밀라(Mila)를 중심으로 한 연구진은 2026년 1월 발표한 논문에서, 사람 10만 명과 여러 생성형 AI에게 같은 과제를 냈다. 서로 뜻이 최대한 멀리 떨어진 명사 열 개를 나열하는 과제였다. 단어 사이의 의미 거리를 계산해 점수를 매겼고, 점수가 높을수록 더 창의적이라고 보았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여러 AI 가운데 챗GPT는 평균적인 사람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사람 10만 명 가운데 가장 창의적인 상위권만 따로 골라 AI와 다시 겨루게 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떤 AI도 이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연구진은 이 상위권에 평소 글을 많이 다루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짧은 시와 영화 줄거리를 직접 쓰게 하는 실험도 함께 진행했다. 이번에도 사람이 쓴 글이 AI가 쓴 글보다 더 넓은 의미의 폭을 담아냈다. 사람과 AI가 쓴 글을 컴퓨터로 다시 비교해 보니, 점수가 비슷할 때조차 둘은 서로 다른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결과는 닮아도, 글을 짓는 방식 자체가 서로 달랐다는 뜻이다. 우리말에는 재미있는 낱말이 하나 있다. ‘짓다.’ 집을 짓고, 밥을 짓고, 이름을 짓고, 시를 짓는다. 짓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들을 엮어 그 자리에 없던 무언가를 세우는 일이다. AI도 짓는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정교하게 이어 붙인다. 그러나 그 결합에는 이유가 없다. 왜 하필 그 단어였는지, AI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럴듯하게 조합할 뿐이다. 인간이 짓는 것은 다르다. 자전거 뒷자리에서 붙잡았던 아버지의 허리, 새벽 시장의 비린 냄새, 그사이 희끗해진 머리카락. 이 모든 것이 문장 하나하나에 이유를 준다. 인간의 창작은 결합이 아니라 사연이다. 겪은 일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것을 붙들어, 왜 그것이 여전히 자신에게 남아 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일이다. 그 설명이 곧 의미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이야기를 짓고 노래를 짓고 제사를 지어 왔다. 우연히 일어난 일에도 뜻을 붙이고, 뜻밖의 만남에도 섭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오래된 습관이다. 그날 밤 필자라면, AI가 써 준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쓸 것이다. 완성도는 떨어지겠지만, 그 글에는 새벽 시장과 자전거 뒷자리가 있을 것이다. 매끄러운 문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누구의 삶에서 왔는가이다. AI는 오늘도 무수한 조합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그 조합에 이유를 붙이고 사연을 엮어 마침내 의미를 짓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당신이 지은 마지막 문장은 무엇으로부터 왔는가. AI가 창작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의미를 짓는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학습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성장한다

받아쓰기 시험지에 틀린 글자 하나 때문에 울던 아이가 있었다. 다음 시험엔 그 글자를 다시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 돌아보면, 아이 안에서 달라진 것은 그 한 글자만이 아니었다. 틀려도 손을 다시 드는 사람, 실수한 친구를 나무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오답에서 시작했지만, 하나는 정답을 익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배웠다’고 부르지만, 이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중국 산시성 소재 타이위안사범대학교 교육대학 연구진은 2026년 6월,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 777명을 조사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연구진은 교실이 실수를 다루는 분위기, 곧 오류관리 풍토에 주목했다. 이 풍토는 두 가지 경로로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이 노력으로 자란다는 믿음, 곧 ‘성장 마인드셋’을 키우는 경로다. 연구진은 이 두 경로 가운데 어느 쪽이 아이의 도전하는 힘, 이른바 혁신 자기효능감에 더 크게 이어지는지를 살폈다. 두 경로 모두 유의미했지만 격차는 뚜렷했다. 두려움을 줄이는 경로보다 성장 마인드셋을 키우는 경로가 세 배 남짓 크게 작용했다. 단지 겁먹지 않게 된 것보다, 자신이 자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아이의 도전하는 힘과 훨씬 더 강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 결과로 실수를 어떻게 해석하도록 돕느냐가 아이의 성장 마인드셋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짐작한다. AI도 학습할 수 있다. 정답과의 차이를 계산해 오차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내부 수치를 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개선은 딱 그 작업 안에 갇혀 있다. 손가락을 더 정교하게 그리게 된 이미지 생성 AI가 더 신중해지거나 겸손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문제를 더 잘 풀게 된 언어 모델이 다른 낯선 문제 앞에서 태연해지는 것도 아니다. AI의 학습은 능력 하나를 갱신할 뿐, 그 능력을 지닌 존재 자체를 바꾸지 않는다. 어제보다 나아진 수치가 있을 뿐, 어제보다 나아진 존재는 없다. 반면 사람은 한 번의 실패로 그 기술만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달라진다. 시험에서 무너져 본 경험은 훗날 전혀 다른 자리에서, 낯선 이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학습으로는 무엇을 아는가를 배우고, 성장으로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를 배운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에게, 또 서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빨리 정답을 맞히는가가 아니라 실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사람은 그 일 하나만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너그럽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걸어 나온다. 그 너그러움과 단단함은 시험지 밖에서도, 삶의 다른 자리에서도 그 사람을 지켜 준다. 알고리즘은 갱신되고, 사람은 성장한다. 그 차이를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키우는 방식이어야 한다. AI가 학습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성장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분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맥락을 읽는다

전화기 너머로 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나 잘 지내.” 짧은 한마디인데 어머니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말끝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고, 웃음소리 뒤에 미세한 머뭇거림이 섞여 있다. 몇 초의 침묵, 그 틈에서 어머니는 이미 알아챈다.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정작 딸은 그 어떤 사정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같은 말을 인공지능(AI) 스피커에게 건네면 어떨까. 문장은 정확히 인식하고, “다행이네요”라는 다정한 답이 곧바로 돌아올 것이다. AI는 문장을 읽지만, 문장 뒤에 숨은 떨림은 읽지 못한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교 연구진은 2025년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간극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연구팀은 이미지, 영상, 언어를 다루는 AI 모델 350여 개를 모아 실험했다.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3초짜리 영상을 AI에게 보여 준 뒤, 연구진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 매긴 평가와 뇌 반응을 AI가 얼마나 정확히 예측하는지 비교했다. 물체와 장면을 처리하는 뇌 영역의 반응에서는 AI가 비교적 사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무엇을 하는지, 서로 소통하는지처럼 사회적 상호작용이 걸린 장면에서는 한계가 뚜렷했다. 특히 그 장면을 볼 때 나타나는 사회적 시각 처리 관련 뇌 반응을 인간 수준으로 예측한 모델은 없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었다. 사람이 쓴 문장 설명을 함께 받은 AI는 영상만 보고 판단한 AI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비슷하게 맞혔다. 언뜻 사람과 비슷하게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볼 때 사람의 뇌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니 결과는 달랐다. 문장 설명을 받은 AI조차 사람의 뇌 반응은 제대로 맞히지 못한 것이다. 답은 비슷하게 냈지만, 그 답에 이르는 방식은 사람과 달랐다는 뜻이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나 상황을 판단하는 일을 맡은 뇌 부위에서는, AI가 사람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지금의 AI는 정지된 장면을 읽는 데는 능숙해졌지만,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살아 있는 장면을 인간처럼 읽어 내기에는 아직 서툴다는 것이다. 맥락을 읽는다는 것은 정답에 가까운 판단을 내놓는 일이 아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을 알아채는 일이다. 목소리의 떨림, 시선이 머무는 시간, 침묵의 무게 그리고 그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봐 온 시간의 축적.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맥락이 완성된다. 정답을 맞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알고리즘은 어제와 오늘의 표정을 나란히 비교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살아 있는 존재로 대하는 오래된 방식이다. 말보다 먼저 마음을 읽고, 정답을 찾기보다 상대를 살피는 것. 그 능력은 데이터를 쌓는다고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함께 밥을 먹고, 눈을 맞추고, 서로의 침묵을 견뎌온 시간 속에서만 조용히 자란다. 오늘 당신은 누군가의 말 뒤에 숨은 표정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AI가 분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맥락을 읽는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7면

[AI 말고 인간!] AI가 답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되물어 답한다

저녁 식탁, 국을 뜨던 아이가 문득 숟가락을 멈추고 묻는다. “왜 밤하늘은 까매?” 어른은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몇 초 뒤 화면 위로 정갈한 문장이 뜬다. ‘우주가 계속 넓어지면서 빛이 멀어지고, 해가 진 동안에는 우리가 있는 곳에 햇빛이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숟가락을 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궁금증은 채워졌는데, 무언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느낌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와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등의 연구진이 참여해 2025년 12월 발표한 논문에서, 5세에서 7세 사이의 아이 103명을 두 집단으로 나눠 2주간 실험했다. 한 집단에는 과학수업 중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 했고, 다른 집단에는 귀 기울여 ‘들으라’ 했다. 2주간의 과학수업이 끝난 뒤, 연구팀은 새 과학 영상을 보려면 스티커를 몇 개까지 낼 수 있는지 물어, 새 정보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를 가늠했다. 질문하며 수업을 들은 아이들은 그저 듣기만 한 아이들보다 더 많은 스티커를 기꺼이 내놓았다. 새로 알게 될 지식에 매긴 값이 더 높았다는 뜻이다. 특히 처음부터 과학을 잘 몰랐던 아이일수록, 질문해 보는 경험 뒤에 새 과학 정보를 더 얻고 싶어 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집단이 실제로 배운 과학 지식의 양에는 뚜렷한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연구팀은 아이들이 더 많은 답을 들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왜?’라고 물어본 경험 때문에 새 지식을 더 값지게 여기게 됐을 수 있다고 본다. 무언가 물으려면 먼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들여다봐야 하고, 그 빈틈을 알아차리는 순간 지식은 비로소 아이에게 값을 지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AI는 이 빈틈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엇을 물어도 답하지만,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이가 별을 보며 왜냐고 묻기 전, 마음속엔 이미 작은 균열이 자라고 있었다. 그 균열이야말로 질문의 시작이며 배움의 출발점이다. AI에게는 그런 균열이 없다. 물음이 던져지는 순간 즉시 메워야 할 빈칸일 뿐, 며칠이고 품고 다니는 궁금증이 아니다. 요즘은 물음표를 띄우기 전에 먼저 화면을 켠다. 회의 중 모르는 말이 나오면 손을 들기보다 조용히 검색창을 연다.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워할 것은 무지가 아니라, 그 무지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덮어버리는 조급함이다. 질문은 무지를 고백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 고백을 생략한 채 얻은 답은 지식이 되지 못하고 화면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질문은 답보다 불편하다. 무엇을 모르는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식을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AI는 세상 거의 모든 물음에 답할 수 있지만, 단 하나의 물음도 스스로 품지 못한다. 궁금해하는 능력,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잠시 멈추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닌 배움의 문이다. 인간의 진짜 답은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 또 다른 물음의 형태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오늘 당신은 완결된 답을 구했는가, 아니면 그 답을 새로운 물음으로 되돌려 보냈는가. AI가 답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되물어 답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공감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파한다

새벽 두 시, 병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있던 이는 결국 휴대폰을 켠다. 손가락이 떨리는 채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간다. 몇 초 뒤, 화면에는 흠잡을 데 없이 다정한 문장들이 도착한다.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문장은 매끄럽고 위로는 정확하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보다 먼저 찾는 것이 화면인 시대다. 그런데 이상하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가슴 한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 헛헛함에는 이유가 있다. 텍사스대학교, 하버드대학교, 토론토대학교, 히브리대학교 소속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은 2026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른바 ‘인공지능(AI) 공감의 역설’을 정리했다. 낯선 사람에게 위로의 글을 받아 든 이들에게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고 평가하게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AI가 쓴 문장을 인간이 쓴 문장보다 더 공감적이라고 평가했다. 문장이 더 매끄럽고, 더 세심하며, 감정을 더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의사나 위기 상담 훈련을 받은 상담원과 견주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평가는 곧바로 뒤집혔다. 같은 문장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덜 공감적이라 느꼈다. 결정적으로, 실제로 누구의 위로를 받을지 고르게 했을 때는 더 뛰어나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AI가 아니라 사람을 선택했다. 왜일까? 연구팀은 몇 가지 짐작되는 이유 가운데, 인간의 공감이 품이 드는 일이라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것은 내 마음의 일부를 내어 주는 일이다. 듣는 사람도 함께 무거워지고, 함께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인간의 위로는 그래서 한정되어 있다.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아픔마저 밀어두어야 가능하다. AI는 이 무게를 지지 않는다. 슬픈 사연 뒤에 곧바로 다음 사용자의 즐거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AI는 아픔을 이해하고 적절한 언어로 옮길 수 있지만, 그 아픔을 자기 몸으로 나눠지지는 못한다. 공감이라는 말 그대로, 함께 느끼려면 느낄 몸과 시간과 대가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위로가 서툴러도 뭉클한 이유는 정확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 말 뒤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과 무거워진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곁에 있는 이가 아파하면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몸이 움츠러든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도 함께 아파하는 이 반응이야말로 오랜 세월 사람과 사람을 묶어온 끈이었다. 병자를 찾아가 손을 잡고, 상을 당한 이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일이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정확한 위로의 말이 없어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이기 때문이다. AI는 언제나 정확하고 지치지 않는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그러나 그 위로에는 대가가 없기에, 받는 이의 마음 깊은 곳까지는 가닿지 못한다. 진짜 위로는 나를 덜어 상대에게 건네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당신은 정확한 말을 고르고 있었는가, 아니면 함께 아파하고 있었는가. AI가 공감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아파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발전한다? 그래도 발전을 이끄는 것은 인간이다

채용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자마자 화면에 숫자가 뜬다. 적합도 82퍼센트. 몇 년의 경력과 밤새워 고쳐 쓴 자기소개서가 화면 위에서는 퍼센트 하나로 요약된다. 이 숫자를 매긴 것은 인공지능(AI)이지만, 애초에 무엇을 ‘적합’이라 부를지 기준을 정한 것은 사람이었다. 서류를 낸 사람은 그 사실을 잊은 채, 화면에 뜬 숫자 앞에서 조용히 작아진다. 병원의 진료 예약도, 은행의 대출 심사도 다르지 않다. 사람은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새로운 숫자로 다시 태어난다. 스페인 국립과학연구소 총재실 산하 연구윤리국에 재직 중인 존 루에다(Jon Rueda)를 비롯해, 철학과 법학, 컴퓨터공학을 연구하는 유럽과 남미 여러 나라의 학자 13명이 2025년 3월 국제학술지에 함께 글을 실었다. 이들은 최근 AI 관련 법과 정책에 ‘존엄’이라는 말이 놀랄 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정작 그 뜻을 정확히 규정한 곳은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유럽연합의 AI법에는 존엄이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쓰였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조항은 없다고 덧붙인다. 학자들은 존엄을 두 갈래로 나눠 짚는다. 하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재적 존엄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과 처신에 따라 달라지는 지위로서의 존엄이다. AI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한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대개 염두에 두는 것은 내재적 존엄 쪽이다. 그런데 내재적 존엄은 애초에 침해될 수 없는 것이어서, 엄밀히 말하면 AI가 그것을 훼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다만 사람이 마치 그 내재적 존엄을 갖지 않은 것처럼 취급될 수는 있다. 존엄을 빼앗는 주체는 없어도, 존엄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로 결정하는 주체는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은 AI가 아니다. 지원자를 퍼센트로, 환자를 위험 등급으로, 시민을 신용 점수로 읽어 내기로 정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다. 무엇을 ‘위험’으로, 무엇을 ‘적합’으로, 무엇을 ‘효율’로 볼지 그 기준을 알고리즘 안에 심어놓은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저절로 생겨난 결론처럼 받아들인다. 자신이 세운 기준 앞에서 도리어 자신이 심판받는 처지가 되는 셈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기준을 정한 손은 점점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과 그 발전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AI는 계산을 더 빨리, 더 정교하게 해낼 수는 있어도, 무엇을 계산해도 되는지, 무엇은 계산 밖에 남겨 두어야 하는지는 판단하지 못한다. 사람을 숫자로 줄여도 되는 순간과, 결코 줄여서는 안 되는 순간을 가르는 것. 그 경계를 긋는 일은 어떤 알고리즘도 대신할 수 없다. 발전이 계속될수록 이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그럴수록 그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할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오늘 당신을 스쳐 간 화면 속 숫자와 등급 가운데, 누가 그 경계를 그었는지 묻지 않은 채 그저 받아들인 것은 없었는가. 기술이 아무리 앞서 나가도, 그 앞에 설 방향을 정하는 손은 결국 인간의 것이어야 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빠르다? 그래도 인간이 먼저 도착한다

채팅창에 질문을 남기면 AI는 순식간에 답을 내놓는다. 몇 초 만에 문장이 줄줄 이어진다. 그 앞에서 사람은 이상하게 조급해진다. 나도 이만큼 빨리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메시지에 답장이 조금만 늦어도 불안하고, 검색 결과가 바로 뜨지 않으면 답답하다. 물건을 살 때도, 밥을 고를 때도, 진로를 정할 때도 우리는 점점 더 빨리 정하려 한다. 빠른 것이 곧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어느새 믿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빠른 결정이 좋은 결정일까. 중국 칭다오대학교 심리학과 궁쥔 연구팀은 2026년 4월 이 질문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연구팀은 같은 참가자들에게 확실한 돈과, 딸 수도 잃을 수도 있는 도박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 참가자들은 한 번은 1초 안에 서둘러, 또 한 번은 시간제한 없이 여유롭게 같은 선택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가자들의 눈이 어느 선택지를 얼마나 오래, 몇 번이나 바라보는지 정밀한 장비로 하나하나 살폈다. 결과는 뚜렷했다. 1초 안에 골라야 했던 순간, 참가자들은 두 선택지를 제대로 비교하지 못했다. 눈길이 한쪽에만 짧게, 그것도 몇 번 머물지 않고 곧바로 결정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급히 고른 답은 눈에 먼저 들어온 정보나 표현에 쉽게 흔들렸다. 특히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일수록 더 크게 흔들렸다. 정작 신중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더 성급해진 것이다. 반대로 시간이 충분했을 때는 같은 사람들이 양쪽을 여러 번 오가며 천천히 비교했고, 그만큼 한쪽으로 치우치는 정도도 훨씬 적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급하게 고른 답은 그 순간엔 빨라 보이지만, 나중에 다시 확인하고 고치는 일이 잦다. 실수를 바로잡느라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충분히 살피고 고른 답은 처음엔 느려 보여도 다시 손댈 일이 적다. 결국 끝까지 다시 헤매지 않고 가는 쪽은, 서두른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살핀 사람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누른 주문 버튼은 다음 날 반품으로 돌아오고, 화가 난 채로 보낸 문자는 나중에 사과할 말을 덧붙이게 만든다. 회의 중 서둘러 정한 결론은 결국 다시 모여 논의하게 만들고, 급하게 정한 진로는 몇 해 뒤 다시 갈림길 앞에 세운다. 그 순간엔 빨랐어도, 전체로 보면 시간을 두 번 쓴 셈이다. 우리가 오래 써온 ‘빨리빨리’라는 말도 사실은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서두르라는 말이 아니라, 다시 하지 않도록 한 번에 제대로 하라는 뜻이다. AI는 빠르다. 하지만 그 빠름은 단 한 번의 대답일 뿐,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책임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오늘 내린 결정을 안고 내일을 살아야 하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언젠가 되돌아가 다시 걸어야 한다. 그러니 사람에게 진짜 빠름이란,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서두르다 놓친 것은 없었는가. AI가 빠르다? 그래도 인간이 먼저 도착한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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